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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와 준하

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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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자와 한 식구가 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정도 많이 들었지.
까칠하던 봉자도 이젠 많이 착해졌다. 어제 봉자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머냐고?

요즘 봉자가 많이 짖는 이유에 대해 알게 된 것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름 추측하건데......
어제 일찍 들어갔는데 왠일인지 봉자가 짖지 않더구나.
그래서 생각했지. '아~~~ 늦게 들어 온다고 짖었구나'
가만 생각해보니 일찍 집에 갈 땐 잘 안 짖었던 것 같구나.

아래 글은 오래 전 아버지가 오마이뉴스라는 인터넷 신문에 기고한 글이란다.
엽기적이랄 수 있는데 그 시절엔 다 그랬단다. 한번 읽어보렴.







봉구야 봉구야!




여느 시골 집과 마찬가지로 나의 부모님도 늘 개를 키웠다. 대개 코 주위가 시커멓고 몸 색깔이 누런 황구였지만, 간혹 눈이 똘망똘망하고 하얀 털을 지닌, 시골에선 어울리지 않는 강아지도 키웠다.

머리가 까실까실했던 중학교 2학년 때, 석실 사시는 큰 고모님과 회룡 작은 고모님이 강아지 한 마리씩을 보내오셨다. 졸지에 두 마리의 강아지가 생긴 것이다. 신이 난 건 나였다. 학교를 마치면 그 두 녀석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녀석들은 비록 족보도 없는 변견이었지만 그 영리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앉아!, 일어서!' 쯤은 기본으로 알아 들었다. 물건을 멀리 던지면 입으로 물어 오기까지 했다.

코가 시커먼 큰 녀석은 아버님이 '도꾸'라 이름을 붙이셨고, 털이 하얀 작은 녀석은 '해피'라 불렀다. 물론 '해피'란 그럴듯한 이름은 내가 지어 준 거였다. 태어 난 곳은 달랐지만 '도꾸'와 '해피'는 늘 함께 다녔다. 어찌나 금실(?)이 좋았는지 우리 식구는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의 사랑과 질시를 동시에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아버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이 헛간 주위에 모여 계셨다. 가까이 갔다. 난 너무 놀라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그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해피가 눈이 토끼눈마냥 벌게져 있었던 것이다. 으르렁거리며 사람들을 위협할 땐 표독스럽기 까지 했다.

나도 몰라 보았다. 그렇게 애달프게 불러도 해피는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내 두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독약을 먹은 것이었다. 예전엔 살쾡이나 족제비같은 야생동물이 심심찮게 시골 민가로 내려왔었다. 촌부들은 가축을 해치는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싸이나'라 부르는 맹독성 약을 곳곳에 뿌려 놓았었다. 해피가 그걸 먹은 것이었다.

아버님은 어렵게 해피를 잡았다. 비눗물을 강제로 먹여 토하게 했지만 헛일이었다. 잠시 후 해피의 몸은 축 늘어졌다. 그렇게 해피는 갔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피가 죽은 지 서너 시간이 채 못 되어 도꾸 역시 비슷한 증세를 보인 것이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단 하루만에 아니 몇 시간만에 키우던 개 두 마리가 약을 먹고 죽게 된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집에선 다시 개를 키우지 않았다. 회룡의 작은 고모님이 한 마리 더 주시려 했지만 부모님은 거절하셨다. 해피와 도꾸가 죽은 이듬해 나는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용돈을 받으러 한 달에 한 번씩 시골집을 다녀갔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 방학 때, 봉구를 처음 만났다. 그 녀석과 나는 단박에 눈이 맞았다. 몇 년 전에 죽은 해피와 도꾸 때문에 차마 '개 한 마리 키우자' 는 말을 못했는데, 든든한 개가 집을 지키고 있었으니 어찌 반갑지 않았겠는가.

영리했던 해피와 도꾸와 달리 봉구는 점잖았다. 이 녀석은 논밭에 들어가도 고랑만 골라 다녔다. 농작물을 헤치는 법이 없었다. 길거리에 널려 있는 변도 먹지 않았다. 내가 동네 어귀에만 들어서도 어찌 알았는지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고는 핥고 비비며 애정을 표시했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집 앞 100미터쯤에 서면 '후다닥' 소리가 들린다. 대문을 박차고 달려나오는 봉구. 온 털을 휘날릴 정도로 힘껏 뛰어 오는 봉구. 꼬부러진 길모퉁이에선 속도를 늦출 법도 한데 봉구는 스케이트 선수처럼 땅에 닿을듯 말듯 코너링을 하며 나에게 달려 왔다.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받으러 시골집을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온통 봉구를 향한 것이었다.

그 해 여름이었다. 무얼 먹으면 땀이 삐질삐질 나고 밖에라도 나갈라치면 온 몸이 땀투성이었다. 오랜 자취생활로 심신이 지쳐 있는 까닭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단 하루 쉬고 보충수업이 시작돼 시골집에 다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저녁쯤 전화가 왔다. 아버지였다. 고향집에 다녀가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아예 일주일 정도 보충수업에 참석 못한다고 선생님께 말하고 오라셨다. 나 역시 보충수업이 곤욕이었고 시골 있는 친구도 만나고 싶었다. 아니 그 무엇보다 봉구가 보고 싶었다. 봉구와 함께 산으로 들로 뛰다니면 힘이 날 것도 같았다.

일주일간 땡땡이 치기로 작정을 했다. 담임 선생님의 화난 얼굴이 아른거렸지만 눈을 질끈 감기로 했다. 다음 날 고향집으로 향했다. 시외버스 정류소에 내렸다.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려 집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봉구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씨익' 웃음이 났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보통은 '후다닥' 소리와 함께 봉구가 달려나와야 정상인데 동네 어귀는 조용했다.

"어무이 저 왔심더!"

어머님이 반가이 맞으시고, 아버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난 봉구부터 찾았다.

"봉구는 어데 갔습니꺼?"
"너거 고모가 다시 델꼬 가뿌따."

아버님이 담배에 불을 붙이시며 대답을 하셨다. 그 때의 섭섭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 고모는 와~ 주따가 다시 가꼬 가는데?"

허탈했지만 나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속이 있었다. 고모님 집은 기껏 걸어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않았다. 저녁 먹고 다시 데려 올 것이라 작정을 한 것이다. 더군다나 날 가장 이뻐하시던 작은 고모님이 아니시던가?

어머니는 가마솥에 뭔가를 계속 끊이고 계셨다. 끊임없이 장작을 아궁이 속으로 밀어 넣어셨다. 저녁 때가 되었다. 어머님이 도마 위에다 소고기로 보이는 고기를 건져 아버님께 주셨고 큰 대접에 국물을 담아 와 저녁상을 차리셨다. 어머님께 건네 받은 그 고기를 아버님은 능숙한 솜씨로 썰어 먹기 좋게 접시에 담으셨다.

"많이 묵어라."

아버님은 갈빗살과 고기 몇 점을 담은 그릇을 내 쪽으로 밀어 놓으셨다. 그 고기를 보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 놓인 고기의 갈비뼈가 돼지나 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기 때문이었다.

"아부지 이거 무슨 고긴데예?"'
"……."
"이거 돼지고기는 아이고, 소고기도 아인 거 같은데예?"
"……."
"아부지, 이거 혹시 봉굼니껴?"

그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거드셨다.

"씰떼없는 소리말고 묵거라. 봉구 아이라 안 카나. 봉구는 너거 고모가 가 가따 캉께네."
"그라마 이기 무슨 고긴데…."

난 버럭 소릴 질렀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거짓말하는 걸 부모님들이 단박에 알 수 있듯이, 나 역시 부모님께서 사실이 아닌 것을 얘기할 때 얼굴에 묻어있는 난처함을 읽을 수 있는 나이였다. 어머님은 아니라고 했지만 난 봉구란 확신이 들었다.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봉구가 몇 점의 수육이 되어 저녁상에 오른 것이다. 그렇지만 숟가락을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그건 객지에서 공부한다고 허약해진 자식놈을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 달인 보약과도 같은 것이다. 때문에 차마 매몰차게 안 먹겠다 할 수 없었다.

우습고 엽기적라 할지 모르나 당시 나는 봉구에 대한 사랑과 부모님의 정성 가운데서 엄청난 고민과 번민을 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문과, 이과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부모님을 따를 것인가. 봉구에 대한 의리를 따를 것인가.

의리가 앞서면 불효자가 되고, 효자가 되면 배신자가 되는 그야말로 '골 부서지는' 상황이었다. 생각을 추스렸다. 이왕 봉구는 죽은 목숨,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 불효자가 될 수는 없지. 부모님도 봉구를 누구보다 사랑했을 거다.'

나는 오로지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생각으로 수육 한 점을 참기름 냄새 고소한 막장에 찍어 입에 물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봉구야, 미안하다.'

그리곤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봉구야! 너는 죽어서도 이렇게 주인한테 충성하는구나. 살아서는 귀여움으로 죽어서는 맛있고 야들야들한 고기로.'

아침엔 맑은 국, 점심 때는 갖은 야채를 넣고 끓인 장국, 저녁엔 다시 맑은 국과 수육. 그렇게 일주일 정도 먹으니 어느새 봉구의 흔적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몸을 추스린 나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희한한 것은 그 이후로는 한 여름 에어컨 나오지 않는 만원 버스를 타도 땀이 나오질 않았다는 것이다. 뭔가를 씹기만 해도 땀이 삐질삐질 났는데,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두 그릇을 비워도 땀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몇 십년 만에 한 번 찾아왔다는 폭염의 계절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오늘 늦은 아침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어느 프로그램에서 누런 황구가 나왔다. 하필이면 그 이름이 봉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봉구가 없었다면 그 후 수년동안을 까맣게 모르고 지냈을 터이다.

'왜 시골 집에선 다들 개를 한마리씩들 키웠는지, 왜 그 개들은 일년만 지나면 없어졌는지, 그리고 이내 똥강아지 한 마리씩을 다시 들였는지, 이모가 왜 그해에 강아지 한마리씩을 줬는지, 해피와 도꾸 사건 이후 다시는 집에 개를 들이지 않으려고 하신 부모님이 왜 봉구를 키웠는지를.'
2004-07-20 17:47 ⓒ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