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하와 준하

산하 소풍, 선생님 도시락을 싸다.

산하에게

박물관 견학이라며? 얼마전까지만하더라도 '소풍'이라 불렀지. '소풍'이란 말이 일본 식민지배의 잔재이지만 아버지는 관성때문인지 여전히 친근하게 들리는 구나.

내가 국민학교(그 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단다. 이 또한 일본 식민지배의 잔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야) 5학년 때의 '소풍'을 떠올려 보았단다. 당시에 김밥은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어. 소풍이나 운동회 때나 먹을 수 있었지. 그래도 아버지는 나은 형편이었단다. 산하 큰 아버지나 고모 때에는 흰 쌀밥에 어묵 반찬을 최고로 쳤으니까. 그나마도 못 싸가는 이들이 많았단다.

소풍 가는 날이면 아침 일찍부터 상인들이 리어카나 지게에 먹을 거랑 장난감을 싣고 학교로 왔단다. 용돈을 많이 받은 친구들은 아침부터 이것저것 사 먹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가방을 만지작 거렸지. 왜 그랬을까?

지금 기억해보니 5학년 소풍 날 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용돈을 200원 받은 것 같다. 가방엔 사이다 한 병, 삶은 계란 두 개, 김밥 도시락이 들어 있었지. 삼양라면 하나에 50원인가 60원 했으니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2,000원 정도 될까?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뽑기도 했었단다.

그럼 어디로 소풍을 갔을까? 주로 가는 곳이 소벌라는 곳이었다. 소벌은 지금 '우포'라 불리우고 있지. 산하도 여러 번 가 본 곳이야. 할아버지 산소 있는 곳이지. 장기자랑, 보물찾기같은 것을 했는데 아버지는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기억이 별로 없구나. ㅡ,ㅡ

아~~~ 미경이라는 친구가 생각나는구나. 4학년 때 도시에서 전학을 온 친구였는데 무용도 잘 하고 유행가도 잘 불렀단다. 소풍 때 한복 입고 오는 유일한 친구였지. 장기자랑 때면 단연 이 친구가 으뜸이었단다. 장기자랑 할 때 였지. 근데 이 친구가 나에게 관심이 있었나봐. 갑자기 나보고 같이 나가자고 하는 거야. 헐~~~~ 아버지는 부끄러워 외면했지. 근데도 계속 조르는 거야. 주위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자 얼굴이 벌게져 이렇게 버럭 소릴 질렀지.

"가스나야 안 나간다안카나...."

아무튼 아버지 때 소풍은 정말 기다려지는 날이었지. 비록 부족한 게 많았지만 모두들 재밌고 신나게 놀았단다. 산하 선생님과 산하 도시락을 싸면서 아버지는 어려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옛날을 떠올렸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