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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와 준하

나의 인생

 

나의 인생



박산하


나의 인생은 정말 좋았다. 어떻게 보면 짜릿했지만 다르게 보면 힘겨운 인생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인생이 즐거웠다. 1997년 8월 29일부터 태어난 나는 벌써 16살이 되었다. 지금이 돼서야 이때까지의 인생을 진지하게 되돌아본다.

 
나는 1997년 창원에서 태어났다.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갔다. 아기 때 나는 유난히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사실 나는 한 살, 두 살과 같이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은 거의 없다. 한 가지 기억이 있다면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초밥 장사를 했다. 그리고 이 장사는 꽤 잘 되었던 것으로 안다. 
 이후 4살 때는, 창원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이때 처음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 처음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4, 5살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나는 종종 동생과 함께 우리 집의 베란다를 수영장으로 삼기도 했다. 베란다에서 하는 수영은 정말 신났었다.

 
6살 때 우리 집은 외할아버지 집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애린 어린이집’에 가게 된다. 롤러코스터의 시작은 이때 쯤 부터이다. 나는 이사를 와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빠르게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어린이집 생활이 재미있었고, 선생님들도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외할아버지 집에서 생활할 때, 아버지께서는 종종 작은 방에서 축구를 하며 놀아주셨다. 이것이 나와 축구의 질긴 인연의 시작점이다. 이때부터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꽤나 소질을 보인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애린 어린이집’을 다녔다. 마치 방과 후 학교 수업 같았다. 어린이집에는 또래 친구들도 많았다. 어린이집에서는 수학을 잘 가르쳐주었다. 나는 수학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고, 또 친구들에 비해 잘하게 되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쉬는 시간에 항상 축구시합이 벌여졌다. 나는 또래 아이들 중에서 공을 제일 잘 찼다. 친구들은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나는 친구를 사귀는 하나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까지 구남초등학교에 다녔다. 공부를 딱히 잘하지는 못했다.
 내가 3학년이 끝날 무렵, 우리 집은 나와 동생의 학업을 위해 학업 분위기가 좋은 사직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겨울방학 시기 였다. 이사를 하고 난 두 번째 날, 나는 아파트 작은 마당에서 축구를 했다. 이때 처음 ‘정주혁’이라는 친구를 만난다. 그때 본 주혁이는 나보다 공을 훨씬 잘 찼다. 달리기도 여태껏 내가 본 친구들 중 가장 빨랐다. 이전 학교에서 가장 공을 잘 찼던 나는 작은 걱정에 빠지곤 했다. 이 학교에서도 공을 가장 잘 차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혁이가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해 나는 ‘사직초등학교’에 전학하였다. 입학한 바로 그날, 주혁이가 눈에 띄었다. 같은 날, 같은 반에 전학을 온 것이다. 이후 나는 주혁이와 단짝친구로 발전한다. 둘은 학교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했다.


이때까지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학업부분에서 친구들에게 인정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4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 나는 처음으로 공부방이란 곳을 가게 된다. 그 전까지 학원도 가본 적이 없었다. 열심히 했다. 그 결과 평균 98점이라는 큰 성과를 이루어낸다. 반에서 1등이었다. 이때부터 학업에 대한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다. 친구들은 나를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아이로 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쯤, 나는 축구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엄마께 때를 쓰기도 하였다. 아버님께서는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축구 보급반’에 나를 등록해 주셨다. 비록 선수반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축구를 하는 것이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5학년이 되어 나는 학교 축구부 활동을 하였다. 5학년이었지만 6학년이 주축인 축구부에 들어가 스트라이커로 자리매김 하였다. 꽤 많은 골을 넣었다. 축구에 대한 나의 꿈은 깊어만 갔다. 
5학년 초기 때, 나는 ‘부산아이파크 보급반’에서 선수반으로 올라가는 공개테스트를 받지 못한다. 팀에서 축구를 하던 친구들이 선수반으로 많이 올라갔다. 나는 당시 큰 상심에 빠졌었다. 나는 혼자 보급반에 남겨졌다. 하지만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어느 날, 훈련을 하던 도중 저 멀리서 선수반 코치님인 ‘정수진’코치님이 보였다. 나는 그날 이를 악물고 열심히 뛰었다. 나는 코치님 눈에 띄어 선수반 테스트를 보게 된다. 테스트를 보러가서 전에 나와 같이 공을 차던 친구들을 만난다. 덕분에 잘 적응 할 수 있었고, 그것이 테스트에 많은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테스트를 잘 마친 나는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축구 선수단’에 입단한다. 이때부터 나는 사직초등학교에서 가장 공을 잘 차게 되었다.


나의 축구 스토리가 시작 되었다. 이전부터 축구를 가장 좋아했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나는, 입단 소식에 정말 기뻤다. 하지만 축구세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많이 힘들고, 벅찼다. 많은 대회를 다녔다. 우리 팀은 ‘MBC리그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달성했다. 한국의 13살이하 아이들에게 가장 큰 대회인 ‘동원컵 왕중왕전’에서도 3위를 한다. 중학교 진학 시기가 오자, 많은 성과를 낸 우리들을 부산아이파크 15세 이하 클럽인 신라중학교에서 모두 스카우트 하려고 했다.
 6학년 때 나는 거의 축구만 하며 생활했다. 공부에는 거의 뜻이 없었고, 성적은 계속 떨어져만 갔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나로서는 평균 70점대의 점수에 눈물이 고이곤 했다. 낮은 점수 때문에 학업에 대한 걱정이 늘었다. 나는 진로의 갈림길에 섰다. 공부, 축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축구 동료들은 축구를 택하여 전진했다. 하지만 나는 내적갈등이 상당히 많았다. 결국 나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축구를 하며 가장 잊혀 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왕중왕전 4강에서 떨어진 날이다. 떨어짐과 동시에 그날이 친구들과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경기에서 지고 점심을 먹는 데, 아이들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동료 ‘진엽’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아이들이 모두 덩달아 울었다. 오랫동안 울고 나서야 주장의 “먹자”라는 말에 퍼진 자장면을 울음 참고 먹었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과 나는 서로 반대되는 길을 택했지만, 커서는 꼭 성공해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는 요즈음에도 공부를 하다 힘들면 이때 생각을 한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잡힌다.


공부를 택한 나는 이제 열심히 하는 일만 남았다. 축구를 그만두고 나는 공부를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공부는 축구보다 쉽다.’, ‘공부는 하면 쉽게 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1학년 첫 번째 시험을 망쳤다. 168등이라는 충격적인 등수이다. 두 번째 시험은 174등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꾸준히 열심히 공부를 한다. 그 결과 내 성적 그래프는 쭉쭉 올라가고 있다. 지금은 21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해서 더욱 성적을 올릴 것이다.


나는 학교생활에도 잘 적응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 운동 잘하는 아이, 노래 잘하는 아이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때문에 인기도 많았고, 많은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사직중학교 전교회장이 되었다.
 나는 몇 일전 ‘김국진’의 인생 강의를 인터넷으로 보았다. 김국진은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롤러코스터는 레일 위로 올라갔다가 빠르게 떨어지고, 또 올라간다. 그 강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롤러코스터는 많이 떨어질수록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였다. 조금 더 발상을 바꾸어 보면, 많이 올라가야 많이 떨어질 수 있고, 그래야만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 나는 중학교 생활이 잘 이루어지고, 성적도 잘 나고 있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 인생에 슬럼프가 온다고 해도, 다시 올라갈 것을 생각하며 이겨낼 것이다.





 

나의 인생



                                                                       박준하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 해보자면 “아직 까지는...”이다. 일단 공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4학년 때까지는 공부에 대한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별로 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금만 공부해도 잘나왔다. 5학년에 들어와서 1학기 첫 중간고사 까지는 잘나왔다. 한 2일 공부했던 것 같다. 그 다음 기말고사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기말고사에는 공부를 거의 안했고, 학교 수업에만 의존했다. 이때 까지 잘나왔기 때문에 긴장도 풀려있었다. 시험점수가 나오기 며칠 전, 어떤 여자애가 말했다. “야 너 과학 78점 나왔데.” 나는 별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78점은 이때 까지 고사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점수였다. 그리고 시험점수가 나왔다. 평균 86점 이었다. 3학년 때부터 평균이 80점으로 간적이 없었는데 조금 충격을 먹었다. 그리고 그 다음 2학기 중간고사는 공부를 2일 동안 5시간씩 집중해 공부했다. 이번엔 저번보다 더 긴장했고 잘나오길 바랬다. 어떤 애가 말했다. 내 국어 점수가 68점이고 영어점수가 84점이란 것이다. 이러면 나머지 3과목이 90점이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 갔다. 점수를 보니까 평균 95점이었다. 국어 96 수학 86 사회100 과학100 영어94 이었다. 그 애 말이 틀린 것이었다. 그 때 아주 잠시나마 공부에 자신감과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 다음 2학기 기말고사 애들이 쉬울 줄 알았던 과학이 어려웠다고 난리였다. 당연히 나는 점수를 기대하지 않았다. 등수는 조금 올랐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2학기에는 가볼 일이 없는 컴퓨터실에 갔다. 컴퓨터로 설문조사 한다고 갔던 것 같다. 애들은 꾀를 내어서 컴퓨터실에서 시험점수를 봐야겠다고 했다. 우리 반에서 공부 잘하는 편인 영욱이가 94점, 윤서가 93점 이었다. 나도 몰래 시험점수를 봤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균 97점 이었다. 내 인생의 가장 높은 점수였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만 하면 잘할 수 있었던 것이
다. 나는 매우 기뻤다.


이제 전체적인 인생을 생각해보자.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그냥 친구 많고 선생님한테 사랑받는 아이였다. 2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3학년 때는 좀 달랐다. 그때 수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에선 봉사위원이 되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리더가 되고 싶어 했다. 수련은 나에게 조금 다른 면이었다. 이때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를 나는 받았고 결론을 내야 했다. 처음엔 그걸로 명상부장인 내가 애들의 의견을 다 통합해서 아이들의 결론을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주제가 어려워 졌다. 내가 했던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주제는 ‘왜 동생을 돌봐야 할까?’였다. 내가 가장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동생입장이 아닌 형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은 토론이었다. 팀을 나눠서 자기 팀의 주장에 맞게 준비를 해서 정말로 결론이 날 때 까지 토론을 했다. 그런 기회는 내가 나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좀 더 표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4학년 때는 그저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친구와 의견 다툼이 좀 많아져서 친구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해본 때였다고 기억이 난다. 5학년 때는 운동에 대해 좀 더 관심이 많아 진 것 같다. 4학년 때는 애들이랑 실내에서 놀았지만 5학년 때는 애들이 다 밖에 나가서 축구를 한다. 때문에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실내에 있으면 할 것도 없었다. 가끔 가끔 축구를 하러 나갔는데 그냥 공만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보고 있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축구에 재미를 느낀 건, 우리 반끼리의 축구 시합이었다. 축구에 별로 관심도, 자신도 없는 나는 내게 공이와도 대충 대충 하다가 승부차기를 했다. 애들은 내가 별로 안하니까 나를 일단 차는데 제외 시켰다. 다 차도 승부가 나지 않자 마지막에 나를 내보냈고, 나는 골을 넣고 우리 팀은 이겼다. 근데 내 공이 정말로 예술적으로 날아가서 애들이 그때부터 나를 축구에 무조건 끌고 오려고 했다. 나도 그때 축구에 잠시나마 재미를 느꼈다. 그리고 나는 5학년 2학기부터 수학학원에 다녔다. 거기서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좀 다른 수학을 배웠다. 교과서에 있는 것처럼 공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해야하는 사고력 책을 배웠다. 그리고 욕이 조금 많이 들어가 있는 원장님의 재미있는 수업 덕분에 공부의 재미를 더욱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취미로 넘어 가보자. 나의 변하지 않는 취미는 피아노 이다. 내가 피아노를 처음 접했을 때는 손가락에 힘이 없었다. 그 때문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갔고, 나는 피아노 시간이 좀 더 재미있어졌다. 그렇게 재미있어 진데 까지는 피아노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고 많이 들어주시는 선생님 덕분이 있었다. 때문에 피아노 시간은 내가 고민이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피아노 연주회를 하였다. 그리고 좀 더 워밍업이 되었다. 보통 애들은 연주회가 끝나면 “다음부터 안할래요.” 라고 말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나는 끝나자마자 “다음에는 무슨 곡 칠거에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계기로 연주회를 3번이나 했고, 할 때마다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요즘 생긴 또 하나의 취미는 사물놀이 이다. 정사님이 예전에 한번 배워보라고 하셔서 배우게 되었다. 내가 배우는 곳은 극단 자갈치 부속 다하미 이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고, 유쾌하다. 수련이후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물놀이는 나에게 스트레스도 풀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이제 나의 친구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는 매번 단짝친구가 있었다. 1학년 때는 다 친했다. 2학년 때는 민수와 가장 친했다. 민수와는 선생님도 친한 것을 알고 심부름을 같이 시키고 자리도 같이 앉게 해주셨다. 3학년 때는 용호와 친했다. 용호는 엉뚱했다. 그리고 당시 힘이 약했던 나에겐 힘이 센 용호는 나에게는 친구이자 내가 좀 더 성장할 수 있었던 버팀목 이었다. 4학년 때는 내가 좀 싸움이 잦았다. 의견이 맞았다가도, 안 맞아서 친구들은 편을 갈라 서로 조금씩 싸웠다. 4학년 때 단짝은 은명이다. 은명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있었던 친구다. 5학년 때는 친구가 정말 많다. 우리 주 멤버는 영욱이, 윤서, 덕규, 문어이다. 우리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친구들이다. 한명한명 설명해 보겠다. 영욱이는 정이 들면 정말 착하다. 친구를 조금 가릴 때도 있지만, 특유의 유머감각과 입담으로 우리 반의 분위기메이커다. 윤서는 나와 같은 피아노 선생님에게 배우고 있다. 그리고 나와 말이 통한다. 학교에서는 나와 꼭 붙어 다닌다. 덕규는 축구를 잘한다. 그러나 조금 챙겨줘야 하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엉뚱하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어진다. 문어는 우리 멤버중의 유일한 여자이다. 그래서 윤서와 내가 조금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 고집이 세지만, 공부 잘하고 괜찮은 친구다. 그리고 정보통이라 같이 있으면 우리 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친구 관계는 아직 까지는 괜찮다. 아직 내 인생이 12년 밖에 안 되어서 별로 쓸게 없다. 그래도 정리 해보니까 꽤 괜찮은 인생인 것 같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