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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와 준하

산지댁


 

시집이라고 왔을 때, 신랑은 선친을 잃은 외아들이었다.
급격히 기운 몰락한 가문이었다.

농사일 보다는 친구들과 술 먹고 노는 걸 좋아한 가장인지라 재산은 늘 그기서 그기였다.


시어머니는 글 읽고 정원 가꾸고 사람 속에 있는 걸 좋아했다.

그 아들도 심심하면 책을 끼고 살았다.

시어머니가 별세한 지 수십년 후, 남편과 사별한 지 며칠 후, 산지댁은 마당 한 가운데 포도나무 밑둥을 잘랐고 족보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을 불살랐다.


출산한 다음날 논매러 나간 일은 깜이 안 된다.

없는 집구석에 딸내미까지 고등학교 보낸다고 주위에서 수군거렸다.

인생 대부분, 그러니 자식이 지 밥벌이가 하기 전까지 산지댁은 자주 돈 빌리러 다녔다.

입에 풀칠하기도 만만치 않았던 살림, 자식 다섯 공부시키는 게 보통일은 아니었다.


큰 아들 대학등록금, 작은 딸 시집보낼 엄두가 안 난 날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은 땅마지기 중 마을 앞 두말 반지기 땅을 판 날,

신랑은 술에 취해 늦게 왔고 산지댁은 바느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시골 촌구석, 두 아들 대학 보낸 걸 큰 자랑으로 여겼다.

이제 그놈들 졸업하면 남부럽지 않으리.

믿었던 큰 아들은 대학원 다니다 유학 준비 중 이름 모를 눈병이 났고

또 믿었던 작은 아들 녀석은 대학 다니며 데모질을 했다.

주위에선 신세 조졌다고 또 수군거렸다.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된 건, 잘 자라 준 세 딸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박가 집안 손위아래가 ‘아지메’로 대접하고, 쉬 무시할 수 없었던 건

산지댁의 ‘자존심’과 ‘ 경우’ 때문이었다.

‘경우 디 댄 게 인간이가’

산지댁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줘야 했고

도움을 받았으면 되돌려 줘야 했다.


자식들이 살만해졌다.

어려운 촌로들을 위해 말쌀을 포대에 담았고

더 어려운 친척들을 위해 지갑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보약 한 첩 달여 먹지 않았다.

몸치장을 위해 비싼 옷 한 벌 사본 적 없었다.

대신 자식들이 준 푼돈으로 녹두죽을 만들고 고기국을 끓였다.

홀로 된 이웃과 병들어 아픈 친척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산지댁의 영정이 창산 동네에 도착하자

주름이 오그라진, 허리가 꼬부라진 잘 걷지도 못하는 할매들이

뛰쳐나와
그렇게
그렇게
서럽게 울었나 보다


2012.01.04.00:25분 소천
2012.01.06.13:00경 창녕군 대지면 소야리 우포늪 근처에 묻히시다.